임시규 법원행정처 사법지원실장
임시규 법원행정처 사법지원실장 최근 재판을 소재로 한 영화 '부러진 화살'이 상영되고 있다. 우리 문화예술의 폭이 넓어졌다는 증거이고, 우리 사회에서 재판에 대한 비판이 자유롭게 허용될 만큼 표현의 자유가 보장되고 있다는 징표이기도 하다. 애정과 관심이 없으면 비판도 없다고 했다. 이 영화를 통해 보여준 국민의 사법부에 대한 관심은 감사할 일이다. 하지만 몇 가지 아쉬움 또한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영화의 소재는 재판 당사자가 재판장에게 가한 '테러'이다. 그런데 감독이나 제작자의 본래 의도가 그랬는지는 알 수 없지만, 결과적으로 테러를 미화하고 정당화하고 있다. 영화 속에서 피고인이 인정하는 사실만 가지고 이야기하더라도 그는 재판 결과에 불만을 품었고, 석궁을 가지고 재판장의 집을 찾아갔으며, 화살이 발사되었다. 이런 행위가 과연 법치 국가에서 용납될 수 있는 일인가? 사전에 여러 차례 석궁 발사 연습을 하고, 석궁으로도 모자라 회칼까지 범행 현장에 가지고 갔으면서도 단지 위협만 할 생각이었다는 주장은 할 말을 잃게 한다.
영화는 피고인의 주장은 정당하고 선(善)이며,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 재판부는 부당하고 악(惡)이라고 규정한다. 선과 악의 대립구도는 흥행을 염두에 둔 영화의 속성일 것이다. 그러나 감독이나 영화 속의 인물들은 이것이 단순한 영화가 아니라 실화(實話)라고 주장한다. 그러면서도 어디까지가 실화이고, 어디서부터가 영화의 미학을 위하여 재창조된 것인지를 밝히지 않는다. 그래서 영화 관람객들로 하여금 영화 속의 장면이 재판의 전부인 것으로 오인하게 한다.
이 사건의 본질은 우리 사회의 최후 보루인 사법질서에 대한 테러행위이다. 그것도 생명에 치명적인 해(害)를 가할 수 있는 흉기를 사용한 테러이다. 자칫 국민, 특히 자라나는 청소년에게 이런 테러가 정당하다는 메시지를 심어주지 않을까 우려스럽다. 자신과 뜻이 다르고, 자신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상대방은 악이 되고, 흉기를 들이대도 괜찮다는 논리는 법치주의를 정면으로 부정하는 것이다.
재판 과정을 그리면서 '개판'이라고 하는 대목은 어이가 없다. 1심에서 여러 차례 공판을 거치면서 이뤄진 수많은 증인신문과 각종 증거조사 내용은 관객들에게 보여주지 않은 채, 항소심의 특정 국면만 부각하면서 피해자와 재판부가 사건을 조작하고 있다고 호도한다. 그 방대한 공판 기록을 불과 100분의 영화에 담으면서, 그것도 조각조각 분절하여 보여주고 싶은 것만 보여주면서 "이것은 공판 기록에 나오는 것들이니 모두 사실이다. 그러니 믿으라"고 강변하는 것은 지나친 비약이고, 무책임한 행동이다. 어느 한 쪽의 주장과 제출 증거만을 기초로 사실인정을 한다면 재판은 존재 의미를 잃게 된다.
사법부의 존재의의는 국민의 신뢰에서 찾을 수 있다. 법관은 법정이라는 소통의 장(場)에서 절차적·실체적 정의를 찾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하여야 한다. 그 과정에서 잘못된 것이 있다면 비판을 받아야 하고, 이를 수용하여 끊임없이 개선하여야 한다. 그러나 비판은 생산적이고, 발전적이어야 한다. 우리 국민이 어떠한 사법부를 가질 수 있느냐는 꿈과 이상의 문제가 아니다. 신뢰받는 사법부는 사법부만의 노력으로 완성될 수 없고, 국민과 함께 만들어가야 할 과제이다. 사법부와 재판 자체에 대한 부정은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임시규 법원행정처 사법지원실장 최근 재판을 소재로 한 영화 '부러진 화살'이 상영되고 있다. 우리 문화예술의 폭이 넓어졌다는 증거이고, 우리 사회에서 재판에 대한 비판이 자유롭게 허용될 만큼 표현의 자유가 보장되고 있다는 징표이기도 하다. 애정과 관심이 없으면 비판도 없다고 했다. 이 영화를 통해 보여준 국민의 사법부에 대한 관심은 감사할 일이다. 하지만 몇 가지 아쉬움 또한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영화의 소재는 재판 당사자가 재판장에게 가한 '테러'이다. 그런데 감독이나 제작자의 본래 의도가 그랬는지는 알 수 없지만, 결과적으로 테러를 미화하고 정당화하고 있다. 영화 속에서 피고인이 인정하는 사실만 가지고 이야기하더라도 그는 재판 결과에 불만을 품었고, 석궁을 가지고 재판장의 집을 찾아갔으며, 화살이 발사되었다. 이런 행위가 과연 법치 국가에서 용납될 수 있는 일인가? 사전에 여러 차례 석궁 발사 연습을 하고, 석궁으로도 모자라 회칼까지 범행 현장에 가지고 갔으면서도 단지 위협만 할 생각이었다는 주장은 할 말을 잃게 한다.
영화는 피고인의 주장은 정당하고 선(善)이며,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 재판부는 부당하고 악(惡)이라고 규정한다. 선과 악의 대립구도는 흥행을 염두에 둔 영화의 속성일 것이다. 그러나 감독이나 영화 속의 인물들은 이것이 단순한 영화가 아니라 실화(實話)라고 주장한다. 그러면서도 어디까지가 실화이고, 어디서부터가 영화의 미학을 위하여 재창조된 것인지를 밝히지 않는다. 그래서 영화 관람객들로 하여금 영화 속의 장면이 재판의 전부인 것으로 오인하게 한다.
이 사건의 본질은 우리 사회의 최후 보루인 사법질서에 대한 테러행위이다. 그것도 생명에 치명적인 해(害)를 가할 수 있는 흉기를 사용한 테러이다. 자칫 국민, 특히 자라나는 청소년에게 이런 테러가 정당하다는 메시지를 심어주지 않을까 우려스럽다. 자신과 뜻이 다르고, 자신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상대방은 악이 되고, 흉기를 들이대도 괜찮다는 논리는 법치주의를 정면으로 부정하는 것이다.
재판 과정을 그리면서 '개판'이라고 하는 대목은 어이가 없다. 1심에서 여러 차례 공판을 거치면서 이뤄진 수많은 증인신문과 각종 증거조사 내용은 관객들에게 보여주지 않은 채, 항소심의 특정 국면만 부각하면서 피해자와 재판부가 사건을 조작하고 있다고 호도한다. 그 방대한 공판 기록을 불과 100분의 영화에 담으면서, 그것도 조각조각 분절하여 보여주고 싶은 것만 보여주면서 "이것은 공판 기록에 나오는 것들이니 모두 사실이다. 그러니 믿으라"고 강변하는 것은 지나친 비약이고, 무책임한 행동이다. 어느 한 쪽의 주장과 제출 증거만을 기초로 사실인정을 한다면 재판은 존재 의미를 잃게 된다.
사법부의 존재의의는 국민의 신뢰에서 찾을 수 있다. 법관은 법정이라는 소통의 장(場)에서 절차적·실체적 정의를 찾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하여야 한다. 그 과정에서 잘못된 것이 있다면 비판을 받아야 하고, 이를 수용하여 끊임없이 개선하여야 한다. 그러나 비판은 생산적이고, 발전적이어야 한다. 우리 국민이 어떠한 사법부를 가질 수 있느냐는 꿈과 이상의 문제가 아니다. 신뢰받는 사법부는 사법부만의 노력으로 완성될 수 없고, 국민과 함께 만들어가야 할 과제이다. 사법부와 재판 자체에 대한 부정은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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