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프로그


종교인과 근로소득세 신앙으로

십여년 전에(?) 처음 불거져나온 종교인에 대한 근로소득세 과세에 대해서 한 동안 잠잠하다가 다시 그 말이 나왔고, 당장 시행할 것 같던 정부는 슬그머니 없던 일로 덮어버렸습니다. 그러니까 일부 기독교 젊은 목사들 중에서 이를 비난하는 소리도 나오고, 심지어는 이 결과를 MB에게 뒤집어 씌우는 일도 있기에 그 진실을 알리려합니다.

먼저, 종교인에 대한 근로소득세 과세문제는 기독교 목사들만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종교의 성직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라는 점입니다. 그런데 마치 기독교 목사들만 해당하는 이야기인양, 기독교 목사들만 반대를 하는양 분위기가 몰려가는 것은 유감입니다.

어쨌든, 기독교는 왜 목사들에 대한 근로소득세 과세를 반대하는가?

먼저 '근로'와 '근로자'의 국어사전적 해석을 봅니다.

<근로> 부지런히 일함.

<근로자> 근로에 의한 소득으로 생활을 하는 사람

<근로소득세> 근로자가 근로의 대가로 받은 소득에 대하여 부과하는 과세

성직자는 부지런히 일해서 번 돈으로 생활을 하는 사람이라는 개념에 해당하지 않습니다. 성직자는 돈을 벌기 위해서 부지런히 일하는 사람이 아니라 神(절대자)의 대리인(기독교의 경우는 아니지만 대부분의 종교가 그런 개념을 가지고 있다고 봅니다)으로서 신이 맡긴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만약 성직자를 근로자로 본다면 근로기준법에 정해진 1일 8시간 노동, 초과근무수당, 최저생계비 보장, 목사는 근로자인가 사용자인가에 대한 개념 정리 등등 미리 해야할 일이 많습니다.

문제는 소득이 있으니 세금을 내야하지 않느냐?

그렇습니다. 소득이 있으니 그 소득에 대한 세금을 내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러나 성직자가 근로자는 아니니 근로소득세를 내게 하지 말고 다른 세목(예를 들면 종교인 소득세)을 만들어서 세금을 내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부에서는 이런 주장에는 눈을 감고 근로소득세로만 세금을 징수하겠다고 하니 반발이 생기는 겁니다.

미국에서도 목사들이 세금을 내지 않느냐는 주장도 있습니다만, 미국에서 목사들이 세금을 내는 것은 연금을 받기 위한 것이 큰 이유 중의 하나입니다. 그리고 미국에서는 전임목사(소위 풀타임 목사)와 파트타임목사가 구분되어 있습니다. 파트타임목사는 따로 직업을 가지고 있으면서 일주일의 일정 시간만 교회에 근무하는 목사입니다. 그러나 목사가 다른 직업을 가진다면 목사로 봐주지도 않는 것이 한국 교회의 현실입니다.

욧점은, 목사들이 세금을 내지 않겠다는 것이 아니라 세목을 근로소득세로 하지 말고 다른 소득세(종교인 소득세 등)로 한다면 기꺼이 소득세를 내겠다는 것입니다.

또 한가지 진실은, 다른 종교는 모르겠지만 기독교의 경우에 소득세를 낸다 하여도 과연 면세점 이상의 소득이 있어서 소득세를 내야 하는 목사가 얼마나 되겠느냐 하는 점입니다. 일반적으로 그 비율을 10~20% 정도로 봅니다. 목사들 중에서 열에 여덟, 아홉은 면세점 이하의 소득이라는 말입니다. 최저생계비에 미달하는 소득의 성직자들에 대한 소득 보전은 어떻게 할 것인가도 새로운 문제로 등장하게 될 것입니다.

전체 종교에서 거둘 수 있는 소득세에 대비해서, 최저생계비에 대한 보전과, 성직자들을 근로자로 보게함으로써 잃는 국가의 영혼적 가치는 얼마나 될 것인가, 그래서 순수하게 징수될 세금이 얼마나 될 것인가도 비교해봐야 할 일입니다.

왕십리의 추억 사는 이야기

한양대 건너 덕수고등학교와 왕십리 기찻길 사이가 나 어릴 때에는 미나리꽝이었다. 겨울이면 동무들과 몰려가서 피래미를 잡아서 구워먹던 기억도 생생한데, 언젠가 그 미나리꽝이 메워지고 제재소가 들어서더니, 오늘 저녁 때 지나오며 본 것은 커다란 건물을 짓기 위한 뼈대가 올라가는 것이었다.

안정사로 향하는 길목 배추밭에서 정월대보름 횃불놀이를 하다가 진퍼리 네거리에 있는 소방서 망루에서 보고 불이난줄 알고 소방차가 오는 바람에 도망가던 일.

김흥국이 질러대는 왕십리 노래에서는 느껴지지 않던 왕십리가 조선작(?)의 '왕십리'라는 소설에 광심다방, 광심당구장, 사거리 여관, 기동차길 주변 이야기가 나와서 다정함을 느끼며 읽기도 했었는데,
이제는 그곳들도 다 변하고. 내 큰어머니의 위패를 모셔놓은(정작 당신은 미국에 묻혀계신데) 천년사찰 안정사도 언젠가 보니 콩크리트로 개축을 해서 아쉽더니만, 그 골목에 있던 초등학교 시절 내 첫사랑네 집도 사라져버리고.

추운 겨울밤에 추남인양 이게 웬 넉두리람?

성탄절 有感 신앙으로

성탄절을 맞으면 생각나는 성경구절이 있습니다. 이사야서 9장 6절의 말씀인데, 이 말씀은 주전(BC) 700년경에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장차 예수 그리스도가 태어난다는 것과 그가 누구인지를 미리 알려주시는 말씀입니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이사야 9장6절-

위의 성경구절은 예수님이 누구이신가를 분명하게 나타내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아기를 한 사람 보내주셔서 태어나게 하셨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고대에 국가의 통치자가 자신의 권위의 상징으로 금고리나 열쇄를 어깨에 메었던 것처럼 우주를 통치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기묘자": 예수님의 모든 것은 기묘한 일들입니다. 예수님으로 인해서 우주만물이 창조되었으니 기묘한 일이고, 동정녀(처녀)가 아기를 낳았으니 그 아니 기묘한 일이겠습니까? 거기에다 그 많은 기적과 이적을 행하심도 기묘한 일이고,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감당하지 못할 십자가 처형- 그것도 미리 알고서 모든 고통을 감내하신-과 부활, 승천 역시 기묘한 일입니다.

"모사": 모사란 나쁜일을 꾸미는 사람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카운슬러라는 뜻입니다. 카운슬러는 상담자이지요.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것을 아시는 분이시고, 우리가 무엇을 상담해도 다른 사람에게 발설하지 않으시는 분이시니 우리에게는 최고의 상담자이십니다.

또한, 상담자(카운슬러)는 법정 변호사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심판법정에서 사탄이 우리(구원받은 기독교인)가 죄인이니 천국에 갈 수 없다고 주장하는 데에 대해서, 당신 자신(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음으로 우리의 죄의 값(죄인은 죽음으로 죄값을 치러야 한다)을 모두 갚으셨다고 우리를 변호해주시는 분이십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하나님은 성부(聖父), 성자(聖子), 성령(聖靈)의 세 위격을 가지셨는데, 세 위격은 모두 하나님이시고, 그 중에 성자는 예수님이시니 예수님도 하나님이십니다. 요한복음 1장 1절은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고 했는데, 여기서 '말씀'은 예수님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이시니 하나님이신 예수님도 우리의 아버지이신데, 하나님이 영원히 계시듯이 예수님도 영원히 계십니다(永存).

"평강의 왕이라": 예수님은 이 땅에 평강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요한복음 14장27절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근심과 두려움은 평안을 해치는 요소입니다.

마태복음에서는 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11장 28절에서 30절까지의 말씀입니다.

어찌된 일인지 요즈음에는 성탄절에 예수님이 안 보이십니다. 세상은 온통 산타 크로스 판입니다. 성탄전야에는 중국집에다 대고 울면은 팔지 말라고 야단을 떨고(울면 안 돼), 산타 할아버지가 하나님보다도 더 능력이 많고 세상에 평화를 줄 것처럼 법석을 떨면서 막상 온 땅에 평안을 주시려는 예수님은 교회 안에 가두어두는 세상입니다. 게다가 근래에 와서는 교회 안에까지 산타할아버지가 밀고 들어와서 예수님을 내어쫓으니, 교회 안밖에서 내몰리시는 예수님은 어디로 가셔야 할까?

2012년 마지막 수업 신앙으로

12월1일 학기 마지막 수업-
"기독교 부흥의 비전을 갖자."

내가 미래학자도 아니고 예언가도 아니지만 나름대로 미래에 대해서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post-post-modernism(그 이름이 무엇이 될지는 몰라도)의 시대는 분명히 온다는 것이다. 그 때가 되면 사조는 객관적인 어떤 규범과 진리를 추구하게 될 것이고, 그 요구의 정점에 기독교가 자리잡고 있어야 한다.
여러분과 나- 우리 기독교인들이 어떤 자세로 신앙생활을 해나아가야 그 자리를 기독교가 차지하는 데에 무리가 없을 것인가?

그것은 기독교인들이 이기적 기복신앙에서 벗어나서 진실한 의미의 그리스도인이 되는 데에서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기독교인이 참다운 그리스도인으로서 충만한 사랑과 이타적 가치관으로 세상을 대할 때, 세상은 그들이 원하는 객관적 규범과 진리를 기독교에서 찾으려 할 것이고, 그때에 기독교는 진정한 의미의 "부흥"을 이룰 것이다.
여러분들이 나하고 신학을 공부하고 또 목회자가 되려는 목적은 바로 이 비전을 가지고 목회현장에서 교인들에게 왜 그리스도인답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가르치고 또 그렇게 살아가도록 인도하는 데에 있어야 한다.

그때가 언제일지는 모른다. 30년 후일지, 50년 후일지, 아니면 100년도 더 지난 후일지 모르지만, 어쨌든 우리는 지금 우리의 자리에서 그 비전을 가지고 교인들을 인도하고, 내 자식에게 전해주고, 그 자식의 자식으로 이어가며 그때까지 우리들의 삶의 모습을 통해서 기독교의 위상을 높여가는데에 주력해야 할 것이다.

세상에서 칭찬받으려고 교회 일(문제)을 교회 밖으로 끌고나가는 어리석은 짓은 그만 하기를 언론에 잘 나오시는 장로님들이나 큰 돈을 들여서 유인물을 찍어 돌리는 목사님들에게 권면한다.
내 자식을 내가 때리면 남들도 내 자식을 업수이 여기는 법이다. 가독교를 모르는 남들이 교회를 욕한다고 세상을 향해 교회를 욕하면 그 욕이 어디로 가겠는가?"

신앙과 생활 신앙으로

여전히 매일 아침이면 정형외과엘 들러서 사무실로 나갑니다. 어떤 날은 '아무렇지도 않은 것 같은데 그만 갈까' 하다가 연골에 좋다는 약 처방도 받아야 하니까 일주일이면 닷새를, 지난주부터는 토요일에 충주엘 안 가니까(1월 첫 주까지) 일주일에 여섯번을 갑니다. 가끔 한번씩은 꼬리뼈부분에 물리치료를 받기도 합니다.

그 정형외과는 사무실 근처 상가건물 3층에 있습니다. 1층은 비교적 큰 규모의 슈퍼마켓이 있고, 2층에는 헬스센터가 있습니다.

3층엘 가려고 엘리베이터를 타면 가끔 2층 헬스센터엘 가는 사람이 엘리베이터를 함께 타는 일이 있습니다.

2층까지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는 사람을 보고도 그냥 무심했었는데, 어느 날엔가 갑자기 2층은 헬스센터라는 생각이 났습니다.

"헬스센터엔 왜 가나?" 참 우스운 질문입니다. 헬스센터에는 운동하러 가는 것 아닌가요?

운동을 하러 가는 것은 그곳에 가서 기계를 이용해 운동을 하는 것이 목적이기는 하겠지만, 가는 과정에서 아주 높은 층도 아니고 2층에는 운동삼아 그냥 계단으로 가야하는 것 아닌가 하는 멍청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 생각은 신앙으로 연장되었습니다. 신앙도 신앙 따로, 생활 따로인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신앙은 그대로 생활이어야 하고, 생활은 신앙이어야 할텐데, 기독교인들의 모습을 보면 생활과 신앙이 분리된 경우를 많이 봅니다. 운동을 하러가면서 2층까지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는 것처럼 말입니다.

신앙과 생활이 따로따로 노는 것은 요즈음의 기독교인들만의 특색은 아닌가 봅니다. 예수님도 "그날에 내가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고 한탄하신 것을 보면 말입니다. 이 말씀은 믿는 자들은 많은데 정말 믿음으로 사는 자들이 얼마나 되겠느냐는 뜻으로 확대해석해도 됩니다.

생활과 신앙 - 그것은 하나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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